울고넘는 박달재 곡정보 입니다. 나훈아가 불렀고, 작곡은 김교성, 작사(노랫말 가사)는 반야월이 지었습니다. 먼저 작곡가인 김교성과 작사가인 반야월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별칭: 김성파
출생 - 사망: 1904년 8월 3일 ~ 1961년 2월 2일
성격: 작곡가
출신지: 서울
저서(작품): 능수버들, 고향역, 울고 넘는 박달재, 찔레꽃
대표관직(경력): 대한레코드작가협회 초대회장
정의: 해방 이후 「자명고 사랑」·「울고 넘는 박달재」·「고향역」 등을 만든 작곡가.
기타 김성파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작곡가로 활동했습니다. 20세초반에는 이왕직양악대 출신 연주자들에게 클라리넷을 배웠습니다. 1925년경에는 무령영화를 위한 효과음악 연주단원이었고, 연극단의 막간 여흥 노래반주단원으로도 활약했습니다.
그의 대표작품은 1936년에 선우일선이 부른 「능수버들」입니다. 그 이후에는 신인 가수들을 발굴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1956년에는 대한레코드작가협회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의 작품으로는 「넋두리 20년」, 「사막의 애상곡」(진방남이 부름), 「찔레꽃」, 「직녀성」(백난아가 부름), 그리고 「자명고(自鳴鼓)사랑」, 「울고 넘는 박달재」(박재홍이 부름) 등이 있습니다. 특히, 「고향역」(최숙자가 부른 곡)은 공보처 제정 국민가요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명: 박창오(朴昌吾)
예명: 반야월(半夜月), 진방남(秦芳男), 추미림(秋美林), 박남포(朴南蒲), 남궁려(南宮麗), 금동선(琴桐線), 고향초(高香草), 옥단춘(玉丹春), 백구몽(白鷗夢), 허구(許久)
출생: 1917년 8월 1일
출생지: 경상남도 마산부(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사망: 2012년 3월 26일 (향년 94세)
사망지: 서울특별시 양천구 이대목동병원
1917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미국
1948년부터 2012년까지: 대한민국
직업: 가수, 작사가, 작곡가
장르: 트로트
데뷔: 1939년 태평레코드社 콩쿠르 대회
가족: 부인 윤경분, 자녀 2남 4녀
종교: 불교
박창오는 일제강점기 후반부터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기까지 한반도에서 활동한 작사가/작곡가이자 가수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대중가요 역사상 레전드로 평가받으나,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각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평생 후회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고등학생 시절에 가정 경제적 어려움으로 청주시에서 양복 가게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창력이 뛰어났고, '노래하는 양복쟁이'로 유명했습니다.
1939년에는 조선일보와 태평레코드가 주최한 '전국 콩쿠르 대회'에서 입상하여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활동 중에는 여러 예명을 사용했는데, 주로 '반야월'과 '진방남'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추미림', '박남포', '남궁려', '금동선', '허구', '고향초', '옥단춘', '백구몽' 등 여러 예명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작사를 독식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사가 활동으로는 '소양강 처녀',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 고개', '산장의 여인', '산유화', '만리포 사랑', '무너진 사랑탑', '아빠의 청춘', '열아홉 순정' 등이 있습니다. 또한, 대표적인 가수 활동으로는 '불효자는 웁니다', '잘 있거라 항구야', '마상일기', '꽃마차' 등이 있습니다.
박창오는 일본 제국 시절에도 작사한 곡이 있지만,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노래를 작사하고 많은 히트곡을 낸 작사가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으며,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후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2010년에는 이를 공식적으로 밝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기도 했습니다.